아산시장애인체육회에서 알려드립니다
파리 패럴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.
그런데 패럴림픽의 창시자는 누군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?
스포츠인도, 장애인도 아닌 바로 유대인 신경외과 의사
‘루드비히 구트만(Ludwig Guttmann)’이랍니다.
척수 손상 환자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은 구트만
1899년 태어난 구트만은 1917년, 광부를 위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중
처음으로 척수 손상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.
건강했던 사람이 등뼈 골절로 5주라는 짧은 기간에 사망하는 모습은
어린 구트만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, 그는 독일의 브레슬라우 의대에 입학하죠.
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의대를 졸업한 구트만은 신경외과 의사가 되어
저명한 신경외과 교수, 오트프리드 포에스터(Otfrid Foerster)의
첫 번째 조수가 되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나갔습니다.
하지만 나치의 정권 아래 유태인 구트만은 무사할 수 없었죠.
결국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
타지에서 외로운 삶을 이어 나가야 했습니다.
스토크 맨더빌 병원, 패럴림픽 역사의 시작
몇 년 후, 구트만은 영국 정부로부터 스토크 맨더빌에 있는
응급 의료 서비스 병원의 새로운 국립 척추 부상 센터의
소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.
“간섭 없이 나만의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하겠다”
라는 조건으로 그 자리를 수락하죠.
스토크 맨더빌 척추 부상 센터가 문을 열었을
당시만 해도 하반신 마비 환자의 기대 수명은 부상 후 2년에 불과했습니다.
하지만 구트만은 척추 부상이 곧 사형 선고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죠.
그는 병상에 누워 천천히 정신과 육신이 시들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결심합니다.
‘이들을 침대 밖으로 이끌어내자.’
스토크 맨더빌의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고,
그 다음엔 휠체어에 앉혔습니다.
휠체어에 앉은 환자들은 지팡이로 아이스하키 공
퍽(puck)을 치며 놀기 시작했죠.
그 모습을 본 구트만은 재활 프로그램에 스포츠를 도입했습니다.
환자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날 의지를 심어주고,
사회로 돌아가서도 비장애인과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죠.
양궁, 탁구, 당구로 시작한 경기는 점차 휠체어 폴로, 농구와 같은 팀 경기로 종목을 넓혀갔습니다.
놀라운 점은 환자들이 운동을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는 점이었죠.
환자들은 구트만을 ‘Poppa’,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.